야마나 소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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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야마나 소젠은 1404년에 태어나 1473년에 사망한 무로마치 시대의 무장이자 다이묘이다. 그는 야마나 씨의 가독을 상속받아 세력을 키웠으며, 교토의 치안을 담당하는 사무라이도코로의 수장을 역임했다. 가키쓰의 난을 진압하여 세력을 떨쳤으며, 호소카와 가쓰모토와 인척 관계를 맺고 막정의 정점에 섰다. 말년에는 호소카와 가쓰모토와 대립하며 오닌의 난을 일으켰다. 그는 격정적이고 호전적인 성격으로 '아카이도'라는 별명으로 불렸으며, 실력 중시, 사찰 보호 등의 면모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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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나 소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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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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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야마나 모치토요 (山名 持豊) |
이명 | 야마나 소호 (山名 宗峯) 야마나 소젠 (山名 宗全) 쇼지로 (小次郎) 소젠 입도 (宗全入道) 아카뉴도 (赤入道) |
시호 | 다쓰헤키인덴 사이코 소호 다이코지 (達碧院殿最高宗峯大居士) |
묘소 | 교토시 사쿄구 난젠지 후쿠치초의 신조인 |
관직 | |
관위 | 정4위하 좌위문좌 종3위 우위문독 |
막부 | 무로마치 막부 사무라이도코로 두인 겸 야마시로 슈고 다지마, 빈고, 아키, 이가, 하리마 슈고 |
생애 | |
출생 | 오에이 11년 5월 29일 ( 1404년 7월 6일) |
사망 | 분메이 5년 3월 18일 ( 1473년 4월 15일) |
가문 | |
씨족 | 야마나 씨 |
부모 | 아버지: 야마나 도키히로 어머니: 야마나 우지키요의 딸 |
형제자매 | 미쓰토키 모치히로 모치토요 (소젠) |
배우자 | 해당사항 없음 |
자녀 | 노리토요 야마나 고레토요 야마나 가쓰토요 마사토요 야마나 도키토요 야마나 도요히사 딸 ( 시바 요시카도 실) 딸 ( 롯카쿠 다카요리 실) 딸 ( 기라 요시후지 실) 양녀: 호소카와 가쓰모토 실 ( 야마나 히로타카의 딸) 오우치 노리히로 실 ( 야마나 히로타카의 딸) |
주요 활동 | |
주군 | 아시카가 요시모치 요시카즈 요시노리 요시카쓰 요시마사 요시히사 (요시히로) 요시미 |
2. 생애
야마나 소젠은 1367년 야마나 도키히로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도키히로는 다지마, 빙고, 아키, 이가의 슈고였다. 1433년 건강이 좋지 않았던 도키히로는 은퇴하고 자신의 광대한 영지를 소젠에게 물려주었다. 소젠은 가키쓰의 난에서 아카마쓰 미쓰히데를 물리치고 같은 해에 하리마의 지방관이 되었다.[2]
야마나 씨는 수년간 많은 패배를 경험했지만, 호소카와 씨는 막부의 섭정이었던 간레이의 지위를 장악한 세 가문 중 하나였다. 소젠은 사위인 호소카와 가쓰모토가 누리는 부와 권력에 분개했다. 자신의 힘이 확실해질 때까지 공개적인 전쟁을 벌이기를 꺼렸던 소젠은 여러 계승 분쟁과 다른 정치적 문제에 개입하여 호소카와의 계획과 욕망을 좌절시키고 서서히 자신의 동맹을 얻었다.[3]
1464년, 막부 자체를 둘러싼 계승 분쟁이 발생했다.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가 은퇴를 고려하고 있었는데, 호소카와는 쇼군의 동생인 아시카가 요시미를 후계자로 지지했다. 아시카가 요시히사의 어머니인 히노 도미코는 아들 요시히사의 계승을 확보하기 위해 군사적 지원을 요청했고, 야마나 소젠은 요시히사를 지지하기로 결정했다.[1]
1466년, 양측이 수년간 병력을 모은 후 작은 충돌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1467년 (오닌 원년) 양측은 다가오는 분쟁에 대비하여 더욱 진지하게 준비하기 시작했고, 피난처를 찾고 거리에서의 전투를 계획했다. 야마나 소젠은 아시카가 요시미를 쇼군의 거처로 데려갔고, 요시미의 쇼군직 주장을 지지했던 호소카와는 그에게 접근할 수 없었다. 요시미는 사실상 인질이었다.
수도에서의 공개 전쟁이 지방으로 확산될 것을 우려한 쇼군은 도시 내에서 먼저 공격하는 자는 막부에 대한 반역자이자 국가의 적이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수개월 동안 양측 모두 행동을 취하기를 주저하며 갈등이 진정되었다. 1467년 3월, 호소카와 장교의 집이 화재로 파괴되었다. 몇 차례의 작은 공격과 정치적 책략 이후 5월, 호소카와는 야마나의 장군 중 한 명의 저택을 공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역자이자 국가의 적이라는 낙인이 찍힌 것은 야마나였다. 야마나의 추종자 중 일부는 호소카와의 편에 합류하여 배신했지만, 호소카와의 사절들이 야마나와 그의 동맹군이 군대를 모았던 지방에 파견한 결과, 훨씬 더 많은 수가 편을 바꾸었다.[3]
1468년 설날, 전쟁이 시작된 지 거의 1년이 지나자 전투는 수그러들었다. 그 해 대부분 두 세력은 재건하고 수비적으로만 행동하기를 원하면서, 눈에 띄는 대결과 제한적인 소규모 공격을 벌였다. 양측은 다음 몇 년 동안 군사적이 아닌 정치적 갈등을 벌였고, 1469년 쇼군은 아들 요시히사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하지만 호소카와는 전투에 지쳐 평화를 원했다. 1473년 호소카와와 야마나는 모두 사망했다.[3]
다음은 야마나 소젠의 주요 연표이다.
연도 | 사건 |
---|---|
1413년 | 관례를 치르고, 4대 장군 아시카가 요시모치의 이름 한 글자를 받아 持豊(지토요)라 이름을 짓다. |
1439년 | 정사위하 좌위문사에 임명되다. |
1440년 | 막부의 시소소사에 취임하다. |
1441년 | 막부의 시소소사를 사임하다. |
1442년 | 종삼위 우위문사로 승진, 전임되다. 같은 해 출가하여 종봉이라 칭하고, 후에 종전으로 개명하다. |
1444년 | 우위문독으로 전임되다. |
1454년 | 은거하고, 가독을 야마나 노리토요에게 양도하다. |
2. 1. 가독 상속
에이쿄 4년(1432년) 야마나 모치히로(山名持熙)가 쇼군 아시카가 요시노리의 책망을 받아 폐적되면서 야마나 소젠은 가독을 상속받았다.[2] 에이쿄 7년(1435년) 야마나 도키히로가 사망하였다. 에이쿄 9년(1437년) 형 모치히로가 모치토요(소젠)의 가독 상속에 불만을 품고 거병하자, 모치토요는 이를 진압하였다.2. 2. 세력 확대
1439년 야마나 소젠은 정사위하 사에몬노스케(左衛門佐)에 임관하였다.[2] 이듬해(1440년) 교토의 치안을 담당하는 막부 기구인 사무라이도코로(侍所)의 수장(도닌)이 되었다.[2] 1441년 가키쓰의 난(嘉吉の乱)에서 아카마쓰 미쓰스케(赤松満祐) 등을 토벌하고 아카마쓰 가문(赤松氏) 영지를 하사받아 하리마 등 8개 구니의 슈고직을 회복하여 세력을 떨쳤다.[2]1443년 가키쓰의 난으로 전사한 야마나 히로타카(山名熙貴)의 딸을 양녀로 맞은 뒤 오우치 노리히로(大内教弘)와 맺어주어 오우치 가문(大内氏)과 인척 관계를 맺었다.[2] 1447년 히로타카의 딸을 막부 간레이 호소카와 가쓰모토(細川勝元)와 맺어주어 호소카와 가문(細川氏)과도 인척 관계를 맺었다.[2]
2. 3. 호소카와 가쓰모토와의 대립
호토쿠 2년(1450년)에 출가하여 '''소젠'''이라는 법명을 받고, 가독을 야마나 노리토요에게 물려주었다. 교토쿠 3년(1454년)에는 아카마쓰 가문의 출사를 둘러싸고 제8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와 대립하여, 정무에서 손을 떼고 다지마국으로 내려갔다. 아카마쓰 미쓰스케의 조카 아카마쓰 노리히사가 하리마에서 노리토요의 자식이자 소젠의 손자인 야마나 마사토요를 공격하자, 다지마에서 출병하여 노리히사를 쫓아내었다. 조로쿠 2년(1458년)에는 사면받은 뒤 다시 상락하여 교토로 들어가, 막정을 둘러싸고 사위인 호소카와 가쓰모토와 대립각을 세우게 되었다.[2]산칸레이 가문인 하타케야마 가문의 가독 분쟁에서 가쓰모토는 하타케야마 마사나가를 지지하였으나 소젠은 하타케야마 요시나리를 지지하였고, 시바 가문의 가독 분쟁에서는 가쓰모토가 시바 요시토시를 지지한 반면, 소젠은 시바 요시카도를 지지하였다. 이처럼 야마나 소젠은 유력 가문의 후계자 문제에 개입하면서, 자신의 사위이자 막부의 유력자인 호소카와 가쓰모토와 대립하게 되었다.
2. 4. 오닌의 난
간세이 6년(1465년), 아시카가 요시히사를 낳은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의 정실 히노 도미코는 아들에게 쇼군직을 물려주기 위해 야마나 소젠에게 접근했다. 분쇼 원년(1466년)에는 호소카와 가쓰모토와 공모하여 쇼군 요시마사의 최측근들을 실각시켰다(분쇼의 정변). 같은 해 12월에는 하타케야마 요시나리를 상락시켜 쇼군과 대면시켰다.[1]오닌 원년(1467년), 하타케야마 마사나가를 실각시키고, 간레이 직에는 야마나 파의 시바 요시카도가 취임하였다. 가미고료 신사 전투에서는 요시나리에게 가세하여 마사나가를 구축하였다. 5월에는 소젠과 대립하는 아카마쓰 마사노리가 하리마로 침공한 것을 비롯하여, 쌍방의 산발적인 충돌이 일어났다.
야마나 소젠은 고노스미야 성에서 각국에서 결집한 서군을 이끌고 거병하여, 교토로 진군하였다(오닌의 난). 당초 무로마치 막부 쇼군 저택과 쇼군의 신병을 확보하고 있던 호소카와 가쓰모토 휘하의 동군에 견주어 열세였으나, 8월에는 스오국에서 상락한 오우치 마사히로와 합류하여,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상황이 되었다.[3]
분메이 4년(1472년)에는 화해 교섭을 진행하였으나, 아카마쓰 마사노리의 반대로 인해 실패, 5월에 소젠은 자결을 시도하였다. 이듬해 분메이 5년(1473년), 병사하였다. 향년 69세. 장남 야마나 노리토요가 오닌 원년(1467년) 진중에서 사망하여, 가독은 노리토요의 장남 야마나 마사토요가 이은 상태였다.[2]
3. 묘소
4. 인물 및 평가
야마나 도키히로의 아들로 태어난 야마나 소젠은 아버지로부터 다지마 국을 비롯한 광대한 영지를 물려받았다.[2] 가키쓰의 난에서 아카마쓰 미쓰히데를 물리치고 하리마 국의 지방관이 되면서 세력을 확장했다.[2]
호소카와 가쓰모토가 간레이 지위를 차지하자, 야마나 씨는 여러 차례 패배를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권력에 분개했다. 소젠은 힘을 키우면서 여러 정치적 분쟁에 개입하여 호소카와의 계획을 방해하고 동맹을 확보했다.[3]
1464년,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의 후계자 문제를 둘러싼 분쟁이 발생했다. 소젠은 아시카가 요시히사를 지지하며, 아시카가 요시미를 지지하는 호소카와와 대립했다.[1] 1467년 오닌의 난이 발발하자, 소젠은 서군(西軍)의 총대장으로서 동군(東軍)의 호소카와 가쓰모토와 교토를 중심으로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1473년 소젠과 호소카와 가쓰모토가 모두 사망하면서 전쟁은 점차 종결되었다.[3] 소젠은 격정적이고 횡포한 성격으로 알려져 있지만, 병든 가신을 위로하거나 사망한 가신을 애도하는 등 인자한 면모도 보였다. 붉은 얼굴과 호전적인 성격으로 인해 '아카이도(赤入道)'라는 별명으로 불렸으며, 이큐 소준은 그를 비샤몬텐의 화신이라고 표현했다. 소젠은 정치적 야망보다는 군인으로서의 성격이 강했고, 실력을 중시하는 경향을 보였다.
4. 1. 성격 및 일화
야마나 소젠은 격정적이고 횡포하며 오만한 성격으로 알려져 있다.[5] 가키쓰의 난에서 아카마쓰 씨 토벌에 나서기 전, 부하 병사들이 로쿠조(洛中)의 토구라(土倉)·시치야(質屋)를 습격했으나 소젠은 제대로 대처하지 않아 관령 호소카와 모치유키에게 항의를 받았다.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에게 토벌 명령을 받고 은거 명령까지 받았으나, 반성하는 기색 없이 오히려 요시마사를 욕하였다.하지만 인자한 면모도 있었다. 병든 가신을 위로하거나 사망한 가신을 애도하기도 했다. 분안(文安) 원년(1444)에는 가신의 병이 낫기를 기원하며 다이킨 야쿠시(太秦薬師)에 참배했고, 칸세이(寛正) 원년(1460)에는 사망한 가신을 애도하는 법회를 열었다. 분메이(文明) 원년(1469)에 사망한 가신 야기 엔슈(八木遠秀)를 위해 아미타불의 육자명호를 써서 보내기도 했다.
이큐 소준(一休宗純)은 소젠의 붉은 얼굴과 호전적인 성격을 비샤몬텐(毘沙門天)에 비유했다. 소젠은 군인으로서의 성격이 강했으며, 막부에서 공식적인 정무보다는 군사적인 면에 주로 관여했다.
무로마치 시대 말기에 쓰여진 『塵塚物語』에는 오닌의 난(応仁の乱) 중에 소젠이 "이제부터는 '예(例)'라는 글자를 '시(時)'로 바꾸어도 좋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시세를 중시했다는 일화가 있다. 이는 소젠이 형식보다 실력을 중요시했음을 보여준다.
4. 2. '아카이도'라는 별명
야마나 소젠은 얼굴이 붉고 호전적인 성격 때문에 '아카이도(赤入道)'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이큐 소준은 소젠을 비샤몬텐의 화신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4. 3. 정치적 야망과 군사적 능력
소젠은 정치적인 야망보다는 군인으로서의 성격이 강했다는 평가를 받는다.[8] 소젠 시대의 야마나 군은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다른 다이묘들을 압도했다.[8]『카쿄키(嘉吉記)』에서는 소젠은 공식적인 정무에 관여하는 일이 적고, 군사적인 면에만 관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실제로 소젠은 시죠부쇼(侍所頭人) 직책에 1년 남짓 있었을 뿐이며, 이후에는 막부의 숙로(宿老)로서 권세를 누렸다. 소젠은 많은 자녀를 다른 집에 시집보내거나 맞이하여 인맥을 넓혀 세력을 확장하는 방식을 사용했다.[8]
4. 4. 실력 중시
소젠은 형식보다 실력을 중요시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는 무로마치 시대 말기에 쓰여진 『진총물어(塵塚物語)』에 나오는 일화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이 책에 따르면, 소젠은 오닌의 난 중에 방문한 공가(公家)가 선례를 들어 간언하자, "이제부터는 '예(例)'라는 글자를 '시(時)'로 바꾸어도 좋을 것이다", "선례라고 하지만, 그대가 몰락하여 나와 마주하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시대(時)를 중시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가 사실인지 여부는 불분명하지만, 소젠이 당시의 시세(時勢)를 중시하고 실력을 우선시했음을 보여주는 일화로 자주 인용된다.소젠은 쇼엔(荘園)을 횡령하는 등 후대의 센고쿠 다이묘와 유사한 실력 본위의 행동을 보였다.[5]
4. 5. 사찰 보호
야마나 소젠은 자신의 영지인 다지마 국뿐만 아니라 교토의 사찰 보호에도 힘썼다. 그는 여러 사찰에 기부하고 불상을 봉안하는 등 불교 신앙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5. 대중문화 속의 야마나 소젠
야마나 소젠은 소설, 연극, 드라마 등 다양한 대중문화 작품에서 주요 인물 또는 악역으로 등장한다.
에도 시대 후기에 나온 소설 니세무라사키 이나카겐지(偐紫田舎源氏)에서 야마나 소젠은 쇼군 자리를 노리는 악역으로 묘사되며,[1] 浄瑠璃일본어 및 가부키 작품 '가라 세다이 하기'(伽羅先代萩)에서는 역신 닛키 단조의 후원자로 묘사된다.[2]
5. 1. 정루리 및 가부키
浄瑠璃일본어 및 가부키 작품 '가라 세다이 하기'(伽羅先代萩)에서 야마나 소젠은 역신 닛키 단조의 후원자로 묘사된다.[2]5. 2. 소설
니세무라사키 이나카겐지(偐紫田舎源氏)는 에도 시대 후기에 나온 소설이다. 이 소설에서 야마나 소젠은 쇼군 자리를 노리는 악역으로 등장한다.[1]5. 3. TV 드라마
참조
[1]
백과사전
Yamana Sōzen
http://rekishi.jkn21[...]
Shogakukan
2012-08-29
[2]
백과사전
山名 宗全
http://rekishi.jkn21[...]
Shogakukan
2012-08-29
[3]
서적
A History of Japan, 1334–1615
Stanford University Press
[4]
문서
『満済准后日記』応永35年4月23日条
[5]
문서
『建内記』嘉吉元年閏9月9日条
[6]
문서
実際、応仁の乱中に勝元は宗全に従う山名政清に代わって是豊を石見守護としている。
[7]
문서
『大乗院寺社雑事記』文正元年9月13日条
[8]
문서
『大乗院寺社雑事記』文明2年6月13日条
[9]
문서
『大乗院寺社雑事記』文明2年8月12日条
[10]
서적
산인 야마나씨
에비스코쇼 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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